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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한스푼

서삼릉(西三陵) 가는 길..



서삼릉(西三陵) 사적 제200호.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을 중심으로 희릉()·효릉()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숙종()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 원년에 예릉()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가는길은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하차, 5번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41번을 타면 된다. 인터넷이나 안내서엔 마을버스 1번을 타면 된다고 나와 있지만 2010년 5월 9일 관람을 하였을땐 41번으로 바뀌어 있었다.


입구에 그려진 안내도를 간단히 한번 둘러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인-1000원, 소인 500원 대인단체(20인 이상) 800원
소인단체(10인 이상)4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입구에 비치된 안내 책자가 있으니 지참하고 들어가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절기(3월~10월) 09:00~17:30(관람 18:30), 동절기 (11월~2월) 09:00~16:30(관람 17:30)이며, 한바퀴를 도는데
40분 정도가 소요되며 구간이 넓지 않고 급경사면이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바람쐬기에 좋은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좋고, 오른쪽으로 방행을 잡아도 무관하다. 따스한 봄기운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거닐다 보면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할 수도 있어서 일석이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급경사가 없는 완만한 길이고 나즈막히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어느새 나도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 않을까....?


관리소옆에 정겨운 돌 조각이 눈에 뛰어 사진에 담아 보았다... 어릴적 집 뒤안에 널려져 있던 절구통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입가에 미소가 담긴다...


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간과 역사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물엔 관리소라는 푯말을 달고 있었다.
서삼릉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거처인듯 싶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풍경의 우리네 한옥풍이 더욱 돗보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시간을 거슬러 뒤로 온듯한 기분이 든다..


왼쪽으로 오르다보면 의령원이 보인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재 중앙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1949년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봉분 주변에 장명등여러 석물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비의 비문은 영조가 직접 쓴 친필이다.


의소세손(1750~1752)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듬해인 1751년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의령원 옆쪽에 자리잡고 있는 효창원이 있다. 22대 왕 정조와 의빈 성씨()의 소생인  문효세자(, 1782~1786)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문효세자의 무덤은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봉분의 석물로는 상석 1기, 장명등 1기, 망주석 2기, 동물석 6기가 있다.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예릉을 볼 수가 있는데, 날씨가 따가운 날엔 주변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늘진 곳에 자리를 펴고 잠시 하늘을 보며 쉬어도 좋을 것 같다. 저 너머에 예릉이 보인다.


예릉:국말(國末)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예릉을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에 담아 보았다. 능앞에 서있는 문,무인석등의 석물이 보기보다 커서 나름의 포스가 느껴지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나무담을 설치해 놓았음을 참조하기 바라며...


희릉의 앞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물로 약간의 목을 추기며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진에 보이듯이 능의 앞엔 나무로 만든 나즈막한 담이 있다. 꼭 사진에 담고 싶다면 능 옆으로 나있는 길을 이용하길 바란다. 문화제 보호차원에서~~ 물론 그것도 살짝 모르게.....^^


희릉을 사진에 담기전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싸온 김밥을 먹었다. 역시 자연속에서 먹는 김밥의 맛이란..^^
갑자기 어렸을적 수확여행이 떠오른다...


희릉의 아래쪽에 허리굽은 소나무...예를 갖춰 절을 하는듯한 모냥세다...


희릉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1491~1515)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獻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희릉은 처음에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주장하여 1537년(중종 32)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안로는 당시 세자였던인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일을 벌여 당시 능을 조성하는 데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였다.


현 위치로 옮긴 후 중종의 능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의 형식으로 희릉 옆에 조성되어 능호가 정릉(靖陵)으로 바뀌었으나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정릉이 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 옆으로 옮겨가면서 장경왕후 능은 다시 희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단릉(單陵)인 희릉의 석물 배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에 둘러져 있고, 봉분 뒤쪽으로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설치되어 있다. 상석·장명등·망주석 1쌍·문인석 1쌍·무인석 1쌍·석마(石馬)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능의 옆에서 희릉으로 들어오는 입구쪽을 화면에 담아 보았다. 앞으로 더욱 소중히 가꾸어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해본다...


꽤 많은 가족들이 나들이에 나온듯 싶다. 연인과 아이들과 아니면 부모님들과 나들이 나오기엔 좋은 장소 같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서울에서 멀지도 않고, 교통편도 좋으니 말이다.


옆쪽에 우거진 나무 사이로 청설모가 뛰어 다닌다... 한참을 째려보다 훽하니 돌아선다....^^


그러더니 나무위로 올라가 다시금 내려다 보며..... 카메라 포즈를 취한다~~^^;


잘 가꿔진 자그마한 숲이라고 할까...? 물씬 풍기는 풀내음이 좋다... 아니 공기가 좋다고 할까...?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다. 꽃 피는 시기가 각기 틀리니 계절에 따라 색다른 풍경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타고 코끝을 스치는 꽃내음이 좋다. 모든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봄이 그래서 좋다.


마지막으로 입구쪽에 있는 화장실을 한컷 담았다. 나름 깨끗한 화장실이 있으니 너무 걱정 하지 마시라고...^^

TIP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싶다면 돗자리를 준비해서 가는게 좋으며, 간단히 먹을 간식거리는 준비해서 가도 좋을 것 같다.. 앞으로 서삼릉을 찾을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며~~

초입에 허브랜드가 있으니 마지막으로 잠시들려 코에 향기를 불어 넣어줘도 좋을 듯 싶다...^^
                                                                                                                                  -로즈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