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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의 길잡이/In My Opinion

황칠나무, 황칠에 숨어 있는 역사[2]

황칠나무, 황칠에 숨어 있는 역사[2]


[계림지(鷄林志)]에 의하면 -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나는데 6월에 채위하며 색깔은 금빛과 유사한 것으로 햇볕에 말린다. 원래는 백제에서 나는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사람든은 신라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도 황칠공예품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무왕(武王)조에 "당나라에 사절단을 보낼 때 밝은 빛을 내느 갑옷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본기 보장왕(寶藏王)조에는 "백제가 금칠을 한 갑옷을 바쳐왔으며 칠로 장식한 갑옷을 졸병들에게 입혔더니 갑옷의 광채가 하늘에 빛났다"고 밝히고 있다.


[▲ 황칠을 사용한 황칠비녀]


또 당나라 군사가 백암성(白岩城)을 함락하고 말 5만필, 소 5만두, 황칠갑옷 만령(領)을 노획해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황칠을 고구려와 당나라에 바쳤음은 이 지역에서 황칠이 생산되었음을 암시해주는데[당서동이전(唐書東夷傳)]백제조에 의하면 "백제에는 삼도(三島)가 있는데 여기에서 황칠이 난다. 6월에 나무에 흠집을 내어 진을 얻으며 빛깔은 금빛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말하는 삼도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해동역사에 의하면 "백제 서남쪽 바다속에 섬 세 곳이 있는데 거기에 황칠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는 작은 종려나무와 비슷한 것으로 유월에 즙을 채취하여 그릇, 물건에 칠하면 황금과 같아 그 빛깔을 본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황칠은 지금 강진 가리포도(加里浦島)에서 생산되는데 이 섬은 완도(莞島)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이 섬에서만 황칠이 생산된다"고 비교적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 황칠은 사용한 황칠부채]


완도를 중심으로 생산된 황칠은 중국에 조공으로 바쳐졌는데 그 양도 '5되3' 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지 않은 양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책부원귀(冊府元龜)]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19년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칠을 채취하였으며 이것으로 산문갑에 칠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산문갑은 아마 먹감나무 무뉘목으로 문짝과 면판을 장식한 문갑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말기 기록인[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의하면 "가구인 장류의 천판(天板)에 칠을 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가구는 물론 종이에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황칠은 상이나 목판 또는 채상인 삿갓 등에도 사용되었고 통영에서는 나무판에 황칠을 사용하였다. 


또 기후적으로 보아 아열대 지역인 전남 남서지역과 유사한 제주도 탐라지(耽羅誌)를 읽어보면 토산품 항에 "안식향즉황칠목즙" 이라고 기록이 있고 황칠은 艻香性 漆재료로서 뿐만 아니라 안식향산으로서 한약재의 원료로도 사용된 사실이 있었던 것을 추츨할 수 있다.


*1894년(고종31) 12월 현재 제주도 3읍(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각 과원에 있는 황칠목에 대한 주수 현황을 제주목에서 기록한 책이다. 황칠목 총 보유량은 50만주를 상회하고 있다고 기록한다.


*공남을 둘러싼 지방관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황칠, 유자, 귤등 산물이 생산된 지방의 백성들은 유자나무 등에 구멍을 뜷고 호초를 넣어 말라죽게 하기도 하고 밤 늦게 나무를 도끼로 베어버리기도 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 황칠나무의 황칠진액 선물세트]


이렇듯 황칠의 우수한 내용들은 다양한 문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우수성은 주변 국가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또한 황칠나무는 황칠은 칠(漆)로만 우수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복용을 하였을때 당뇨, 혈압, 간기능, 남성 기력강화, 면역력 강화등 현대의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꾸준히 밝혀지고 있는 상태다.


황칠진액 문의: (주)천년  02) 2677-1087   

홈페이지: www.hwangchil1000.com